누구의 인생을 사십니까? (사탄? 그리스도!)
(노만 그럽의 제한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에서 발췌)
새 사람이 배워야 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실제로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은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을 오해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커다란 죄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잘 이해하면 믿음에 커다란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새 사람은 하나님의 병기, 등대, 중보자, 사랑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도구로 선택하신 사람들이 받았던 훈련은 어떻게 옛 사람을 없애 버리느냐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새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모세는 자기 형제들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을 때 누구보다도 거듭남과 헌신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탁월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기록된 모세의 행적은 제자의 신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 중에서도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겪은 어려움은 세상의 유혹이나 육체의 욕망을 물리치는 싸움 때문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닥친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불타는 떨기나무 곁에서 비로서 알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보고 배웠던 것은 원래부터 그 안에 있었던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에 대해 믿고 있었던 모든 생각들이 깨져 나가고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드러난 것을 그제야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존재하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모세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그 분이 진정한 새 사람 모세인 것입니다.
야곱은 또 어떻습니까? 야곱만큼 성경 교사들에게 인색한 평가를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 역사 속에서(다름 아닌 세상의 역사이기도 한) 우리는 주요 인물들의 약점이라 할 만한 것들에 대해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순절 전의 제자들의 동요를 보며 우리는 얼마나 쉽게 손가락질합니까?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주님께 바친 그들의 대단한 충성에는 별로 놀라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이 인물들에 대한 부정적 태도, 다시 말해서 그들의 헌신보다는 단점을 부각시키는 경향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점점 더 나약한 모습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마치 교회가 비효율적이고 세상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못하며, 예컨대 공산주의 같은 세계 동맹을 위한 마귀의 거짓된 주장보다도 더 험악한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는 성령이 이 땅에서 입으신 갑옷과도 같습니다.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효력 없는 듯 여기지 말라"고 바울이 간곡히 말했듯이, 교회를 얕보는 것은 그 분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깃발을 흔들며' 계속 전진하는 하나님의 강한 군대로서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존속할 것이며,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그 어떤 공격에도 다시 일어설 것을 주목하고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이제 다시 야곱의 예로 돌아갑시다. 초기의 야곱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야곱의 초기 시절에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은 할아버지와 더불어 장막을 옮기며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늘의 유업을 사모하는 할아버지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야곱에게도 그 증거들에 대한 사모함을 주었고, 그의 살아 있는 믿음의 광채를 따라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었으며, 그 어린 마음 속에 할아버지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야곱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물론 장자권을 탐내다 형에게 몰인정하게 쫓겨나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혹자는 그것은 독립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에서의 욕심이 함께 빚은 결과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삭이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약점을 제거하고 야곱을 축복하게 만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물론 속임수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고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은 옛 사람 에서가 아니라 새 사람 야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 나타날 수도, 나타내려 하지도 않는 분이셨지만 얍복 강 가에서 야곱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야곱은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깨달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진정 새로워진 존재는 자아 안에 있는 하나님이시며 자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은, 야곱이 초년 시절부터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실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계속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택한 그릇 야곱 안에 꺼지지 않는 성령의 불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러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신약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새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였습니다. 우리는 새 사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올바른 이해 모두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습니까? 헛된 욕망을 따라 부패한 '옛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게 아닙니다. '새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난감함의 근원이며 믿음의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 장(章)'이라 불리는 로마서 7장에 새 사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들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악을 행하려 하는 옛 사람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새 사람입니다.(21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신자로서 가장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옛 사람은 이미 로마서 6장에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진짜 새 사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은 로마서 8장에서 다룹니다.
그러면 로마서 7장은 무엇입니까? '어설픈 새 사람'의 활동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14절과 3장1절에서 말한 자연적, 육체적, 영적인 세 카테고리입니다. 오직 자연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만이 인간에게 영구히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 두 가지만이 인간에게 허용된 본성들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은 사탄의 속성을 담고 있고(엡2:2-3),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을 담고 있습니다(벧후 1:4). 육체적이란 영적인 사람이 되기 전에 잠깐 겪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 시간이 길든 짧든, 로마서 8장에서 빠져 나와 잠시 7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한낮과도 같은 계시의 태양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와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그저 담고 있으면 됩니다. 확신하건대, 구속받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알며 승리하는 삶에 대해 할 말이 있거나 중요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 안에서 그 분의 삶을 사신다는 사실, 신자에게 있어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합니다. 시간과 영원을 통해 그분은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것이며, 그들 안에서 원하시는 장소와 방법을 따라 사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유일한 자아가 되십니다.
이와 반대로 강대상과 교회 의자에서 드리는 기도, 일상의 대화, 위기를 맞은 태도 등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들의 인생에서 일어난 것이지 그 분에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그냥 여기 저기 눈으로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만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확실히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거듭남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의 완전한 의미와 그 뜻하는 바는 잘 모르지만, 그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훗날 확실히 구원받은 어느 구도자의 편지를 인용하겠습니다.
한낮의 태양이 우리를 비출 때 로마서 8 장의 삶과 로마서 7 장의 삶의 이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스스로 해내려는 유혹에 걸려 있는 자아와,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전자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허상인듯 스스로, 마치 육체에 있는 듯 행합니다. '육체'란 타락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성을 가리키는 성경적 용어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주관되지 않는 육체는 즉시 죄된 욕망들이 거하는 장소가 됩니다.(롬7:18-21). 그래서 바울은 사탄이 일시적으로 자신의 겉 사람을 장악하는 것을 보며 스스로 '곤고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의 삶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새 사람의 잘못된 사용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근본적인 계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자아는 절대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거듭나기 전에 사탄이 그들을 다스리고 주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 느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잘못된 상상 때문에 우리는 구속받은 삶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으리라는 본능적인 생각을 새 사람 가운데로 끌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애쓰고, 전도하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보려고 애쓰고, 성경을 공부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듯 우리의 굴레는 아주 힘겹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기를 쓰면 쓸수록 우리가 바라고 목표했던 것의 반대 상황이 우리의 덜미를 잡습니다. (어느 하나를 가동시키면,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것이 가동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구원 받기 전보다 더 추악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진공 상태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사탄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 장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또 어리석고 무지하게도 우리 자신에 의지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혼과 몸에서(성령과 분리된 육체) 죄(자기 사랑의 영)가 솟구치고 그에 대한 절망적인 끌림이 있을 뿐입니다. 자아가 사탄의 유혹을 따라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사탄은 여지없이 자아를 노략질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요새를 탈환할 수 없습니다. 대신 자기의 군대를 보내 성벽을 넘고 요새를 혼란시켜 일시적으로 점령하려는 것입니다. 회개, 고백,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정결함만이 적들을 날려 보낼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이 거듭되는 실패, 긴장과 스트레스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실 때에야 우리의 실수가 보일 것입니다. 새 사람은 그 인간적 면에서는 옛 사람과 다름 없이 절망적입니다. 스스로 아무런 기능도 수행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옛 사람은 우리 안에 있던 사탄이었고, 새 사람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인간은 단지 수용적, 종속적인 대리자일 뿐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로마서 7 장은 영적 수업에서 필수 과정입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이 수업을 받았고, 야곱도 라반과 함께 머무르며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묘한 장의 함정을 어떻게 피하는지 알았습니다. 여전히 의문은 남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언제 행하는지, 우리의 정상적인 삶은 로마서 8 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7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 그 방문이 너무 잦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1장에 기록된 "날마다 죄씻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사람의 올바른 사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 노력의 실패로 무너질 때 우리는 자아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자신을 정죄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 합니다. 두려움과 움츠림, 의문을 갖는 자신을 비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력하고 어리석은 인간임을 알고 절망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약한 존재나 되는 듯 육체의 한계를 슬퍼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내주가 필요한 조건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으로서 우리가 그 분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분이 약하고 무지한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 분이 그들 안에 힘과 지혜를 주셔야 합니다. 그 분이 만드신 것은 텅 비어 있는 그릇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때 안도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한결같은 반응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문제에서 문제로 옮겨 가게 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다른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 밖에 없습니다. 이 교훈을 배워야 했던 한 인물의 자서전적 고백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두번째 편지 입니다.
그의 고백은 진리의 빛으로 번뜩입니다. 철저히 인간적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는 각 장마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가 인간적이기 때문에 그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깨끗하게 될 필요를 느낄 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속된 존재가 바울입니다. 부활과 구원의 능력으로 새로운 인간 됨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인간성에 대하여 단번에, 영원히 죽었던 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바울은 깨끗함을 받고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의 관심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다른 존재에게 맞추어졌습니다.